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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과 외교.
2017-12-18     프린트스크랩



▲ 중국의 바둑을 기록한 연행록의 한 페이지.  이요의 종사관으로 중국을 다녀온 김순협의 연행록에 바둑고수  한수대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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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 중국총리가 문재인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바둑의 전략과 운용에 대한 설명을 한 것은 우리 대통령께서 얼어붙은 한중간의 관계를 풀어가기 위한 양국의 공통 문화인 바둑을 먼저 언급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된다.

사실 한중간에는 루천년 역사를 통해 바둑으로 웃고 울던 사실이 있고 실재로 한중간의 정부의 내각회의에서 바둑을 빗대어 정치현안에 대한 논의를 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담론중 가장 유명한 것이 당국자미방관지심(當局者未訪觀之審 )’일 것이다. 바둑은 곁에서 보는 사람이 수를 더 잘 보니 정책 판단자는 주변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로 조선실록이나 승정원일기등에도 수십건 기록된다.

조선의 역사를 통해 바둑을 실제로 국가 외교에 이용한 사례 하나를 소개 한다. 1731년 영조 7년 청나라 옹정 9년의 승정원일기 기록이다. 영조 7년 4월1일 영조는 이요 윤혜교 역관 김시유등을 대전에 불러 대면한다. 이들은 지난해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온 시신단의 정사와 부사 그리고 통역관이다.


동지사의 사행 목적은 중국에서 선조이래로 아직도 깨끗하게 정리 되지 않는 변무(조선왕실의 혈통과 행실에 대한 오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고 사신단은 중국 조정의 유력자인 '장정옥' '유보'등을 통해 시정할 부분을 옹정제에게 전달하고 확인도 받았다는 보고를 한다.  그런데 이날 보고의 장소에서 영조가 이런 질문을 한다.

"바둑 고수 한수대가 어떤 사람인가?" 

영조7년 4월1일. 승정원일기. 橈又上一紙書曰, 此之辭浩繁, 臣當讀之乎。 上曰, 上之。 惠敎曰, 此則不必卽今御覽之事矣。 上曰, 然矣。 又曰, 與留保輩, 頻頻往來, 甚爲非便, 故托以爲見朝鮮碁爲言, 連爲往來, 而韓壽大, 碁局善手, 故每與是瑜相往矣。 上曰, 善棋韓壽大何許人耶? 曰, 臣之帶去軍官矣。 又謂是瑜曰, 留大人, 皇上信任之臣也。 後當大用, 汝若誠心相交, 則必有益於國事矣.)

'이요'는 '한수대'가 바둑의 고수로 자신이 중국 사행단에 군관으로 대동했다고 답변을 하자 역관 '김시유'는 유보가 조선 바둑에 관심이 많아 한수대를 대동했다며 앞으로 그의 집에 한수대를 파견하여 친교를 맺어 놓으면 조선의 외교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건의를 한다. 김시유는 장정옥과 유보는 아주 친한 친구로 옹정제가 아끼는 대신인 만큼 장래가 보장된 사람들이라고도 말한다.

'장정옥'은 역사에서 청나라의 능력있는 유력한 관료로 평가 받는 사람이니 이날의 영조앞의 토의는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방문과  외교전은 바둑으로 시작하여 바둑으로 끝날 정도로 바둑이 외교의 윤활류로 존재했다. 시진핑 주석은 만찬에서 바둑을 언급하며 대화를 시작했고 선물로 옥으로 만든 기반과 돌을 선물한다.

옥반과 옥돌은 조선에도 존재했다. 실재로 조선 시대 옥 바둑판과 옥 바둑알을 자신의 집에 준비해 놓고 ' 바둑으로 나의 적수가 되고 시로 사람을 경탄케 할 수 있는 사람 만   출입을 허한다'(棋能適我方招至詩不驚人肯許留) 말한  호방한 사람 옥국재 이운영(1722-1704)이 있다. 옥 바둑판 옥 바둑 돌은  바둑을 두는 맛도 나무판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옥반과 옥돌의 의미는  실전용이라기 보다는 귀한 선물의 상징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우의를 더한다는 의미다. 우리 바둑계는 이번 한중간의 살얼음판 같은 외교전에서 바둑이 중요한 매개체로 존재했던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바둑의 가치를 키우고 높이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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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버나일쨩 |  2017-12-18 오후 5:52:45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비둑 외교의 꽃은 김옥균임니다 당시 조선에서 김옥균을 암살하지 않았다면,,,일제36년의 비극도 없었을것을,,,,참으로 딱한 민족임니다,,,  
자객행 김옥균이 살아있엇다해도 그럴수는 없지 않았을까요.
덤벙덤벙 아주 卓越한 識見입니다. 그가 살았으면 韓日合邦을 막을 수는 없었더라도 조금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님의 意見대로 合邦을 막을 수도...그러나 역사에서 what if는 없습니다.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cheers,
李靑 암살범이 프랑스 유학파로 프랑스에서 소설까지 출간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특이합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생각안에서 산다는 뭐...
덤벙덤벙 아이고, 李靑 선생님이 댓글까지 다셨군요. 선생님의 글은 다 읽고 있습니다, 너무 解縛하셔서...1860~1930年代까지의 뉴욕타임즈를 저는 조선왕조실록처럼 일일이 디벼가면서 읽고 있는데 朝鮮 王室은 너무 썩었었어요...
李靑 하하 조선에 한 10년 빠져 살았네요^6^ 조선은 썩은것이 아니라 너무 가난했던 나라라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너무 가난하기에 부사급 정도 되는 사람들도 쌀은 물론 종이 간장이나 된장등 부족으로 허덕이는 .... 그러니 뭘 할 수 있었을까요?
덤벙덤벙 李靑 先生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난했으면 어떻게 하면 쌀이나 보리를 더 生産할 것인가를 每日 硏究했어야지, 平生 孔子曰 孟子曰하고 있었으니 밥 한 톨인들 생길 수 없지 않았을까요? 朴正熙가 어디 돈이 있어서 나라를 세웠습니까? 意地와 行動으로 이룬 것 아닐까요? 저의 微賤한 생각입니다.
李靑 네 썩은거야 지금 정치가 더 썩었죠^^ 어쨋든 제 의견은 조선은 아름다우면서도 아련한 그러 나라였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조선을 좋아하는 것은 절대왕조에서도 논쟁이 허용되고 9급 관원이 국왕면전에서 1급 정승을 대놓고 논박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영 수 틀리면 국왕에게 쪽지로 욕을 쓰고 잘해봐라 하는 관원들이 속출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덤벙덤벙 제가 1997~2006년에 호주에 살 때 서쪽 끝의 퍼스에서 동쪽의 멜버른까지 자동차로 달린 적이 있습니다. 서호주 끝의 2차선 도로에 "멜버른까지 2,000킬로미터"라는 팻말을 보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450킬로인 대한민국에 살던 저로서는 까물어 칠 뻔하였습니다 (그 먼 距離에...). 조선 시대에 배를 만들어 남쪽으로 8,000 킬로미터만 내려갔으면 남한의 66배되는 그 땅은 우리 것이었을텐데... 그 廣闊한 땅에 철길과 도로밖에는 없는 그곳을 다 차지했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객행 |  2017-12-19 오전 4:29:2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바둑으로 나의 적수가 되고 시로 사람을 경탄케 할 수 있는 사람 만 출입을 허한다
대단한 배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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