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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시간과 창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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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시간과 창조성
2013-05-27     프린트스크랩
▲ 1978년 3월 27일, 뉴스카이호텔에서 두어진 9기 명인전 도전4국. 도전자 조 훈현이 서봉수 명인을 3-1로 누르고 8관왕에 등극한 대국이다. 8관,이 다! 조훈현 이후 이창호 9단도 다관왕시절을 누렸지만, 요즘과 같은 속기시 대에선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이다.



<문용직의 수담手談한담閑談●>
봄날의 세우(細雨)처럼 (5편)


6. 설명과 공부에 대해서

 

누구나 수긍할 것으로, 뭔가 기억이 나지 않을 때 바로 그 때에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돌아보자. 이 글은 방금 시도해 봤다. 눈을 찡그리고 왼손을 왼쪽 볼에 대고 턱도 고인다. 이마를 두 손등으로 문지르기도 했다. 감은 눈을 누르기도 했다. 입도 벌리고.

 

우리의 기억은 감각적 지각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손으로 쓰는 거, 중얼거리면서 외우는 거, 이해가 되고 잘 외워질 때 콧노래 나오는 거, 뭔가 순서를 매겨서 기억하고자 할 때 손가락 움직이는 것...

 

알려준다. 우리의 기억은 머리로만 성립되지 않는다.

 

기억과 관련된 것만 예로 들었지만, 사실이 이런 식이니, 바둑의 공부도 마땅히 그런 식이어야 한다.

 

 

6-1. 내면의 시간이 요청된다

 

고바야시(小林光一) 9단은 명인이 된 후에도 옛 명인들의 바둑을 놓아보곤 했다. 그러면 마치 생생히 대화하는 듯한 상태에 들어간다 했다. 참으로 훌륭한 공부. 대화만큼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도 드무니 그러하다.

 

대화. 그것은 상대와의 대화도 있고 자신과의 대화도 있다. 바둑에서 타인과의 대화로는 공동연구나 국후검토가 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자신과의 대화도 중요한데, 소위 지연과정이라는 것이 기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정보를 접할 때-상대의 착수가 그 정보다-그 정보를 해석할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해석은 시간의 지체를 요구한다. 그 과정을 갖지 못하면 우린 반응할 뿐이다. 술 마시고 서로 열심히 떠드는 경우가 그런 경우겠다.

 

초반, 상징적인 초반엔, 특히나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바둑에서 초반은 상징적인 이해가 요구되는 영역. 시간을 가지는 버릇이 있어야 미래를 계획하는 법을 익힐 수 있다. 그것이 구상력(構想力). 계획을 짜는 습관을 들이면 태도가 적극적이면서 긍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수동적이냐 적극적이냐, 그것은 태도로 체화(體化)된다.

 

일반적인 예를 들면, 쓰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느린데 그것이 중요하다. 느리기 때문에 쓰면서 정리가 된다. 아이디어는 낙서할 때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둑으로 말하면 돌을 빨리 잡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글의 초고는 단순했다. 낙서 수준. 그러나 몇 번 쓰고 고치면서 별거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글이라는 발명품에 감사!

 

 

6-2. 설명의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설명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왜 그런가.

 

설명의 방식이 다르면 내용의 이해가 달라진다.

내용의 이해가 달라지면 추론의 힘이 달라진다.

추론의 힘이 달라지면 펼쳐지는 세계가 달라진다.

 

이제, 아니 언제나, 설명과 서술의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질문할 때에는 이 바둑, 누가 유리해?” 보다는, “이 바둑, 형세를 설명해 봐.”가 훨씬 바람직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a) 바둑판이 상징적으로 지각됨을 이해시켜야 한다.

 

“1선은 땅으로 인식되는데 그래서 안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으면 어느새 돌이 아래로 아래로 흐릅니다.”

 

따라서 5선 이상이 되면 불안정하지만, 중앙 지향적인 태도라 영향력이 강합니다. 19줄이 불과 11줄로 줄어들거든요.”

 

(기보9) 중앙 한칸의 의미 - 한칸은 반상을 넓히고 좁힌다

▼ 기보9

 

여기 백20이 참으로 귀한 착수다. 왜 그럴까.

(이 바둑에 대해서는, 오로칼럼 중반상일기” 200499본인방전 전집 - 바둑 두는 사람들을 참조하시라.) 클릭 

(기보9-1) 중앙 한칸의 의미(1)

34선 위주로 생각하면 흑A가 두려워서 B로 벌리거나 하변 C를 생각할 수 있다.

▼ 기보9-1

 

(기보9-2) 중앙 한칸의 의미(2)

▼ 기보9-2

그러나 여기 백1 한칸은, 2 공격을 방지한다. 흑은 백을 공격하는 기쁨은 있지만, 상변이 백1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공격의 효과가 없다.

1은 좌변도 넓힌다.

따라서 백1은 좌변과 상변을 아울러 보강하는 수법이다.

 

여기서 초점은 이것이다.

중앙으로 한칸 뛰면, 그 한 수는 상하좌우 어디로든 한칸 더 나아갔다는 의미가 주어진다.

 

바둑은 격자(格子) 무늬로 이뤄진 세상. 그러므로 어느 수를 두던 동서남북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가장 크게 미치는 것은 중앙으로 가까이 간 경우다.

한칸 더 나아가면, 나아간 만큼 상대를 좁힌다. 자신을 넓힌다.

 

(기보9-3) 중앙 한칸의 의미(3)

▼ 기보9-3

이런 바둑 많이 보셨을 것이다. 의문도 가졌을 것이다.

왜 저리 좁은 데 두나?

 

(기보9-4) 중앙 한칸의 의미(4)

답은 여기에 있다.

▼ 기보9-4

 

좌상귀에 돌(세모) 두 개씩을 더했다.

전체 국면에서 반상이 몇 줄로 좁아들었는가를 생각해보자.

19줄이 아니라 불과 10줄 내외로 반상이 좁아들었다. 남겨진 중원(中原)만 생각한다면. 귀와 변을 서로 점거한 이후, 중앙의 점유 여부가 상대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기준으로 한다면. 중원을 가볍게 A B C D E F 알파벳으로 묘사했다.

 

1과 백3은 좁지 않다. 영향력은 남은 9줄에 미친다. 19줄에 비해 9줄 속에서의 영향력. 그것은 산수로 표현하면 대충 이렇다. 9/9인데 이는 9/19보다 훨씬 크다.

 

 

b) 착수의 심리적 속성을 인식시켜야 한다.

 

끊는 것은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행위입니다. 끊기면 서로가 싸워야 하거든요. 그러면 위험을 느껴 불안하죠. 그래서 끊을 곳도 우린 잘 안 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신의 불안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끊어야 할 때 망설이지 않고 끊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실력의 향상에 중요하죠.”

 

c) 형상의 특성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바둑은 형상의 놀이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세모나 네모를 이룬 것은 안정적입니다. 우리의 방과 집을 생각해보십시오. 바둑은 동서남북 방향을 가진 격자(格子)를 기초로 합니다. 우리네 세상도 그렇습니다.”

 

좁지만 여기 호구 굳힘은 두터운 수법입니다. 세모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기보10) 세모를 이루는 호구가 두텁다

▼ 기보10

1 이하 백4. 모두가 세모다. 좁지만 절대로 급소라 하겠다. 두텁다. 대단히 두텁다.

 

(기보11) 석점 접바둑은 흑에게 대단히 두텁다

▼ 기보11

석점 접바둑은 대단히 두텁다.

백이 석점을 이겨내기란 도샤쿠 같은 실력자라도 어렵습니다.” 오청원 선생의 말씀이다.

 

(기보12) 세모를 이루는 형상은 본질이 같다

▼ 기보12

일명 토치카다. 물론 대단히 두텁다.

세모의 하나요, 석점 접바둑의 다른 얼굴이다.

속성은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누구보다도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 공부와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교재를 보면 가야할 길이 멀고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겠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상의 상징적 세계와 반상을 대하는 심리의 속성을 밝힘으로써, 바둑의 세상을 넓히고 또 의식적으로 깨쳐야 한다. 지금까지는 이런 점에 대한 논의가 시도조차 없었지만, 그러나 생각해보시라. 우리가 바둑을 두는 것은 반상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 받아들인 후 해석하는 과정. 그렇다면 우리의 내면에 대한 이해 없이 해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바둑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바둑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할 수 있을까.

 

 

7. 마치면서: 내적인 시간과 공부

 

앞서 말한 것의 일부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1) 창의력에는 느낌이 중요한 요인인데, 그 느낌은 시간이 주어져야 얻어진다.

2) 시간은 모호함을 다루는 기본 요소인데, 모호한 것을 잘 다루는 것이 곧 창의력이다.

 

서로가 긴밀히 연결된 문제인데, 시간이란, 모호한 세상에서 모호한 세상을 다루는 데 필요한 모호한 방식에 (몸으로) 적응하는 데 필요한 길이, 즉 내면의 시간이어야 한다. 외적인 시간에 그쳐서는 아니 된다.

 

바둑에서는, 아니 바둑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런 시간이 주어져야만 한다.

 

의문이 올 수 있다. 아니 이 바쁜 세상에 언제 그런 시간까지?

그러나 기초가 부실하면 높은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아니, 좋은 건축자재 없이 튼실한 집을 짓겠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망상일 것이다. 그런 경우는 못 봤다.

 

공부를 할 때나 연습바둑을 둘 때 넉넉한 시간을 주면, 실전에서의 시간은 짧아도 된다? 그렇게 분열적인 상황으로 몰아가지는 말도록 하자. 우린 그렇게 자유자재한 존재가 아니다.

 

 

시간.

넉넉한 시간.

 

넉넉한 시간 속에서야 안목이 넓어질 수 있다.

안목이 넓어지면 이해하는 힘이 강해진다. 공부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다.

이해의 힘이 강해지면 해석의 힘과 너비가 변해서, 자연스레 의식의 공간이 넓어지고 아울러 반상 공간도 넓어진다.

수법의 여지가 넓어지기에 새로운 수법의 창조 또한 어렵지 않게 된다.

 

그것이 모아져서 무엇이 되느냐?

바둑이 된다. 반상이 넓어지면 그에 담길 바둑이 넓어진다.

 

 

20세기 초의 30시간 17시간 바둑을 보면서, 수준이나 시간 사용에 대해 낮은 평가가 있기도 한데, 과연 정당한 평가일까.

 

바둑은 공간을 다루는 놀이.

시간은 공간의 다른 표현이기에 서로가 변수가 된다.

그래서 알 수 있다. 공간을 넓히려면 시간을 조정하라. 다양하게 조정하라.

 

따라서 바둑을 넓히려면 시간을 다루어야 함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반상이 넓어질 것이다. 기존의 사유를 넘어서는 고통스런 노력 위에서 우리가 오늘의 바둑을 두고 있음을 잊지 말자. 그 긴 탐색의 시간이 없었다면 우리의 사고는 지금보다 편협했을 것이다. 오늘과 같은 수준의 제한시간이라면 새로운 탐색이 가능하기는커녕 단지 반응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니 말이다.

 

 

이상, 글을 마친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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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민 |  2013-05-27 오전 2:07:1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저는 바둑을 볼때 종종 8개 화점들위의 네모를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늘 실리가 부족한편인데요^^;오늘 사범님말씀중에 비슷한 표현이 있어서 반가웠고 늘 생각할수있는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매일 바둑판을 대하면서도 맘껏 생각하며 수를 찾아가는 바둑을 둬본게 언제였나 싶어요.시간되실때 대구에 한번 놀러오시면 좋겠습니다^^  
北極熊 !!!
高句麗 |  2013-05-27 오전 10:06:5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문용직 박사님을 보면 앞으로 바둑계를 이끌어 갈려면 바둑만 잘두어서는 바둑계를 이끌어 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바둑계를 이끌어 가려면 바둑도 잘 두어야 하지만 문용직 박사님같이 여러 방면의 해박한 지식과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고 어디에서 구애받지 않고 매이지 않는 폭넓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함을 문용직 박사님의 강의를 통해 느낍니다  
高句麗 |  2013-05-27 오전 10:09:5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프로기사는 바둑 잘두는 것이 기본 사명이지만 바둑만 잘두는 사람은 바둑계를 이끌어 가지 못합니다. 바둑만 잘두고 다른 지식이 없으면 자신의 분야밖에 모르고 자신의 분야외는 인정안하는 자신이 아는것 외에 인정 안하는 옹고집이 되기 쉽거든요
이것은 바둑뿐만 아니라 장인이라 불리는 다른 분야의 여러 기술 전문가들에게도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하이디77 |  2013-05-27 오후 3:49: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바둑의 제한시간을 늘여야 한다는 말씀을 수학 명제 증명하듯이 설파하신 거네요.
저는 아마추어 바둑도 시간 짧은 것에 부정적이었는데요.
대회 진행 시간이나 바둑티브이 중계 시간 등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의 편의를 위해서 바둑 두는 시간이 짧아졌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바둑의 수준을 격조를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문기사가 초읽기에 몰려서 실수한 거라는 말은 정말 듣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못봤다고 하면..  
高句麗 사무를 너무 한국기원 편위위주로 하는거 같아요 그래서 발전이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후퇴를 하고 녹화로 1시간 방송으로 편집하면 프로기사들이 두시간 대국하던 10시간 대국하던 상관 없는데 그렇게 하자면 편집하는데 인력이 몇배 들겠죠
高句麗 생방송보다 편집해서 방송하는 것이 몇배의 인력이 투여되지만 대신 생방송보다 더 질좋은 방송을 할수 있다 봅니다 편집을 통해 다음 정답을 맞추는 문제도 내가면서 방송할수도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곁들여 가면서 할수도 있고 그렇게 해야 발전하는데 너무 편리위주로 하니 생방송만 고집하게 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죠
不得貪勝_ |  2013-05-28 오후 2:43:0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문 박사님의 탁월한 혜안은 바둑의 본질을 밝혀주는 횃불과 같습니다. 바삐 흘러가는 세상을 살다 보니 우리의 시야는 너무도 근시안적인 것이 되었나 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하겠습니다. 많은 기우님들이 문 박사님 응원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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