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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마지막 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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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마지막 대국
2009-04-04 조회 8491    프린트스크랩
 

 

그가 다시 나타났다.


한동안 보이질 않아 이젠 서서히 내 기억속의 잔영조차 희미할 무렵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바로 우리 동네 원(!)만(!)이(!) 아저씨.


월드컵이 열리던 지난 2002년 오로 자유게시판에 그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를 다시한번 설명하자면 이런 사람이다.


나이는 당52세. 직업은 없음. 별명은 원만이. 사는 곳은 음모자로부터 지근거리! 결정적인 기력은 기원(약)1급.


내가 이 동네에 이사와 살펴본 바로는 이 양반은 성인이 된 이후 50살이 될 때까지 변변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고, 하루종일 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며, 먹다 깨면서 또 먹고 또 잠시 깨다가 다시 먹는 스타일로 취하지 않은 온정신인 그를 본다는 것은 가물에 콩날 정도로 전형적인 알코올 중독자의 행태를 보여 준다.


원만이란 별명도 그의 술에서 비롯되었는데, 수중에 있는 돈이 다 떨어져 더이상 술값이 없을 때 주변사람에게 '천원만~!' 하면서 참이슬(꼭 참이슬만 고집한다) 값을 구걸하는 간절하고도 애처로운 모습이 그것이다.


이 양반의 성품을 보면 극단적이다. 술이 주량을 넘어서기 전까진 '법 없이도 살 양반'이며, 술이 주량을 넘긴 순간부터는 '법이 없어야 살 놈'으로 양극의 현상을 보여준다.


나 자신도 '법 없이도 살 양반'일 때는 그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지만, '법이 없어야 살 놈'일 때는 안면몰수다.

그래도 나보다 연배고, 남에게 해악을 끼치진 않기에 평소 호의적으로 대해주었고, 내 가게에서도 무료로 술을 제공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그러던 그가 지난 서너 달 눈앞에 보이질 않았다.

자주 나타났을 땐 저 인간 제발 좀 사라져 줬으면 했던 적도 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후 아주 가끔은 궁금해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어제 원만이 아저씨는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났다.
눈자위 밑이 거무데데한 퀭하고 초점 없는 눈과 며칠은 깎지 않은 듯 까칠한 수염, 그리고 한 뼘은(?) 더 움푹 패어버린 볼과 특유의 구부정한 자세로 옆구리엔 바둑판을 하나 끼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동포, 바둑알은 집에 있지?"


그는 항상 자신보다 나이가 연하인 사람에겐 '동포'란 호칭을 썼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물을 틈도 주지 않고 그는 벌써 열린 문으로 들이쳐 바둑판을 펼친다.


"나 동포랑 바둑 한수 하려고 왔어."


아내는 그를 보자 이내 눈치를 주며 억지 손님을 치르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어디 내가 즐거운 손님만 집에 들일 수 있으랴...아내에게 급히 술상을 부탁했다.


"아냐 아냐, 동포...나 술 끊은 지 오래됐어...놔둬 놔둬!"


반신반의하는 내 얼굴을 외면하고 그는 이미 바둑판 앞에 좌정을 하고 있었다.

칫수는 다섯 점.

기원1급과 오로 물1단에 다섯 점 칫수가 어디 가당키나 할까?

그동안 그와의 대국에서 단 한판도 손맛을 못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한수 또 한수. 서로의 엇갈리는 팔 사위는, 361로의 바둑판을 점점 흑과 백으로 채워 나갔다. 다섯 점의 위력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만 갔지만, 왠지 내가 잡은 흑돌이 예전의 그 숨막히던 모습은 아니었다.


늘 위협하던 삼삼 칩입도 그는 쉽게 포기했고, 세력을 집으로 만드는 그의 뛰어난 능력도 그저 시들했다. 이리저리 끊고 호기롭게 씌워대던 모자도 보이질 않았고 가끔, 아니 자주 있는 나의 무모한 과수에도 그는 멈칫멈칫 비켜가기만 할 뿐이었다.


하수의 장고는 시간낭비일 뿐이라며 내가 생각하는 시간에 바둑판 옆을 톡톡 쳐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고, 좋아하는 한라산 담배를(그는 길이가 긴 담배를 좋아했다. 그 이유를 한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자긴 돈이 없어 가격이 가장 싸면서도 긴 담배인 한라산을 사야했고 그것도 반씩 나눠서 피니 한 갑이 두 갑이 되는 셈이라는 대답이었다) 입에 문채 그저 한수한수 두어갈 뿐이었다.


어느덧 바둑은 종반. 곱게곱게 두어가던 그가 돌을 하나 집어들고 1의 1에 슬며시 올려놓았다. 자신이 졌다는 표시였다.


"동포 그동안 바둑 많이 늘었네..."

"아저씨가 오늘 너무 봐주셨는데요?"


그와의 대국에서 첫 손맛을 본 기쁨보다는 예전과 달라진 그의 모습에 놀라움이 앞섰다.


아내가 가져온 소박한 술상 앞에서 그는 끝내 한잔도 입에 대질 않았다. 이따금씩 있는 젓가락질로 안주를 집어 오물거릴 뿐. 정말이지 예전의 원만이 아저씨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술자리에선 세계평화는 내일모레, 통일은 그날 당장 될 듯이 속사포처럼 쏘아대던 그의 언변도 볼 수 없었다.


소주 한 병의 마지막 잔이 내 술잔에 따라졌을 때 그는 다소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동포 나 날짜 받았네..."

"네? 무슨 날짜를......"


"앞으로 6개월 정도라더군..."

".........."


그 6개월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내 상황은 바뀌었다. 나는 침묵을 했고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전과는 달랐다. 그동안 그가 내뱉은 말들은 기고만장과 오만방자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지만 그날은 전혀 달랐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아내와의 이혼얘기 술얘기 자식얘기 주변 친구 얘기들...그 모든 것을 상대의 잘못으로 돌리던 원만이 아저씨가 자신의 잘못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이...


오래 기다렸던 마지막 술잔을 내입에 털어 넣었을 때 그는 몸을 일으켰다. 주섬주섬 돌들을 치워내고 올 때처럼 바둑판을 옆구리에 끼었다. 바둑판의 무게에도 힘겨운 얼굴이 역력한 채 등을 내게 보였다.


"동포 제수씨와 사이좋게 잘 살게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앞에 보였던 그의 등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무엇에 홀린 듯 한동안 우두커니 그가 사라져간 어둠을 바라만 보았다.
원만이 아저씨는 그렇게 내게서 사라져 버렸다.


............................................


그와의 마지막 바둑을 홀로 복기해 본다.

그가 둔 수에서 암수나 비수가 내 눈엔 잘 보이질 않는다.

초야를 앞에 둔 새색시마냥 부끄러운 듯 거친 내 돌을 살포시 보듬는다.


복기를 하며 한수한수 놓아볼수록 내겐 물음표가 늘어간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진정 내게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일까?


비는 아직 그치질 않는다.

저 내리는 빗소리에 다시 한번 새로운 한수를 놓을 수 있다는 그의 외침도 함께 들려왔으면...

 

200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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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선공팔 |  2009-04-05 오전 1:18:5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앞으로 6개월 정도라더군...>

믕...  
밥상엎기 |  2009-04-05 오후 2:20:1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위글이 픽션인지 난픽션인지 궁금하진 않다. 다만 음모자의 이글이 공허하게 내맘을 후벼판다. 음모자는 이미 독자의 맘을 읽고 있는 글쟁이9단이다.ㅋ  
꿈속의사랑 |  2009-04-05 오후 4:46:1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그냥...아련하다. 쓸쓸하다.  
선비만석 |  2009-04-06 오후 1:23:4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음...............음모자~~~~~~~~~~~~  
그랜드슬렘 |  2009-04-07 오전 6:28:1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음모자..어째 대화명이?하지만 대명만큼이나 심오하다는생각이듭니다..가슴 한켠이 짠하니 알수없는 허전함이 밀려옵니다...공수레.공수거라는 옛글을 떠올리며 조그만 위안을 삼으셧으면합니다.....  
못안 |  2009-04-11 오전 11:20:5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마음 찡 해 옵니다  
흑돌앤백돌 |  2009-04-24 오전 2:58:2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2004-04-27을 읽고 여러님들의 댓글도 보고 ,또한 내곁에서 떠나간 사람들을 떠 올려 봅니다.  
babostar |  2011-08-20 오후 12:18:1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숙연해 지는군요  
호구666 |  2016-02-27 오전 1:44:1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사는게 다 그런거지뭐 ㅎㅎ 우리주변엔 이보다 천배나 야릇한일들이 널려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들도 별거않이다, 그냥 사는야기기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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